이 드라마를 리뷰하기 위해 다시 보면서 중간 중간 눈물이 조금 맺혔다. 점점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는 마지막까지의 후반 몇 회는 단지 그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삶의 마지막을 비추는 듯 했고,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픔도 담겨 있는 듯 했다. 사실 원래는 젊은 드라마, 연출과 극본에 대해 모두 할 말이 많은 드라마를 리뷰하고 싶었었다. 첫 드라마 리뷰여서 고르다가 고르기가 어려웠고 결국 연출 하면 떠올렸던 이 드라마를 쓰게 되었다. 글을 쓰기에 앞서 이 드라마는 다소 선정적 장면들이 있어 어린이, 청소년은 보지 말았으면 한다.
기억에 이 드라마를 sbs 주말 드라마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도 보면서도 '어떻게 연출이 저렇게 섬세하지' 싶었던 기억이 있었고, 나중에 회자하면서 주말극이 그렇게 연출이 섬세할 수도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미니시리즈에 비해 주말극은 언젠가부터 카메라 연출이 훨씐 떨어졌기 때문에. 얼마 전 찾아보니 월화 미니였다.
보통 드라마를 기억할 때 스토리가 좋았거나, 배우가 좋았거나 그런 이유인데 이 드라마는 그 무엇보다 연출 때문에 기억되는 드라마이다. 그렇다고 연출만 좋고 연기도 내용도 별로였으면 이렇게 '연출이 좋은 드라마'로 오래 기억에 남진 않았을 것 같다. '예전에 꽤 잘 만든 것 같았는데... 연출이 괜찮은 것 같았는데...' 생각했던 작품도 다시 보면 그냥 그렇네 싶은 작품들도 있는데 이 드라마는 리뷰를 위해서 다시 빠르게 보았는데 그 때 보았던 기억보다도 연출이 더 놀랍다. 이 드라마의 연출을 떠올렸을 때 딱 머리 속에 생각나는 장면은 노란색 불빛, 작은 거실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는 서연이다. 내 기억 속에선 정면이고 위에서 아래로 서연을 향하고 있던 장면이 떠오르는데, 장면을 찾아보려 하니 못 찾겠어서 옆에서 찍은 장면을 올렸다.
예전에 보면서 연출이 인상적이었던 건, 서연의 집, 고모의 집, 골목... 이번에 다시 보면서 눈에 들어왔던 건 놀이터에 앉아 얘기하는 서연과 사촌 오빠의 장면이었다. 그런 변두리 씬마저도 연출이 섬세하게 들어갔다는 것에서 감탄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며칠 전부터 여러 드라마들을 짧게짧게 보면서 연출에 실망한 부분들이 많았어서 이 드라마 한장면 한장면 연출이 깃들어있는 걸 보며 감탄스러웠다.
아까 말했던 골목 장면 중 계단이다. 이런 동네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잘 찾아냈다. 지금이야 이런 동네들이 그래도 남아있긴 한데... 오래된 건물들, 동네들도 보존하는 일본이나 유럽과 달리 조금만 지나면 무조건 다 재건축해버리는 우리나라에선... 나중에 몇 십년 뒤엔 이렇게 뛰어난 배경을 가진 작품이 나오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밤에 야외씬으로 나오는 장소들 속 돌 계단, 다소 덜 다듬어진 것 같은 건물들... 저런 것들을 재건축한 건물들에선 찾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만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닌데, 일본 극에선 어떨까 생각하다가... 일본이나 유럽 다른 나라들은 오래된 집들도 보존하면서 재건축은 극히 선택적으로만 한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배려와 어울림이 녹아들어있던 과거의 건축... 지금의 건축은 그것과 너무 다르다. 여유 공간들도 없고 상업성과 자신들의 독특한 디자인을 뽐내려만 하고 그러면서도 획일적이다. 몇 십년 뒤 전부 재건축되고 나면 얼마나 삭막할지 또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도 걱정스럽다. 저런 자연스럽고 편안한 맛이 전혀 없는 고층에 인위적인 초고층 아파트들만 가득하고, 빈 공간은 없이 토지에서 어떻게든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빼곡하게 들어서있는 광택나는 상가들만 가득한 모습은 상상으로도 싫지만... 그렇게 오고 있는 것 같다. 혹여라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 드라마의 연출에서 인상깊었던 것 두 가지 중의 첫번째는 화면 연출이다. 자연스러운 화면 연출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지 드라마들 중 자연스런 화면 연출을 보여주는 작품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적당한 아웃포커스와 적당한 화면 구성을 위 장면처럼 이뤄낸 것은 물론이고, 거의 매 씬마다 연출에 신경을 쓴 듯 보인다. 디지털 촬영에선 엄청 공들이지 않고선 자연스러운 화면을 얻어내기 힘든가보다. 이렇게 화면을 만들기 위해 신경을 썼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화면 구성 뿐 아니라 텍스쳐도 꽤 놀랍다. 테입 방식의 카메라를 사용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러한 느낌도 앞으로 내기 어려울 것 같다. 테입에서 완전 디지털방식으로 바뀌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테입이라곤해도 필름이 아닌 방식에서 어떻게 이런 느낌을 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디지털 촬영 특유의 어색하고 불안정한 화면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ISO 값을 조정한 건지 사후 처리를 통해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드라마의 화면과 다르다. 어떻게 이런 화면을 만들어냈는지 알고 싶다. 화면 연출에 있어 배워본다면 눈여겨 볼 드라마이다.
두 번째는 물건이다. 이 드라마의 연출은 화면 연출과 소품이 절묘하게 조합되어 하나의 뛰어난 연출을 낳았다. 마치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위 화면 뿐 아니라 다른 장면들에서도 연출을 이뤄냈다. 요즘 드라마들을 간접 광고 때문인지 가구들이 너무나 부자연스러운데 이 드라마는 이 소품들을 구해오는 것만으로도 일이었겠다 싶다. 이러한 소품들은 소품감독이 잘 한건지, 협찬 대행사가 잘 한건지, 연출이 잘 한건지, 혹은 극본의 김수현 작가가 깨알같은 소품들까지 코칭해놓은 건지 궁금하다. 소품감독이 스스로 이렇게 한 거라면 대단하다 싶을만큼 하나하나 신경을 많이 썼다.
현실과는 달리 간접 광고 때문에 어색한 가구와 물건들을 두는 대다수의 드라마들과 이 드라마는 차별성을 보인다. 익숙한 집의 풍경... 앞으로는 현실마저도 이러한 집의 느낌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집안의 물건들은 점점 일원화되고 획일화되고 있다. 과도하게 심플한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세련됐다는 느낌보다는 어색한 모델 하우스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다. 몇 십 년 뒤 이런 연출을 하는 것이 가능할 지 궁금하다. 현실과 다른 어색한 드라마들이 생기고 이제 드라마 속 어색함을 현실이 닮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드라마의 연출은 반갑다.
근사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선 연출이 중요하고, 볼만한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선 배우가 중요하다. 재미와 완성도까지 있는 완성체를 만들려면 극본까지 어울려야 한다. 이 드라마야 워낙이 연출이 잘 되서 왠만한 배우의 연기까지도 커버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캐스팅도 함부로 이뤄지지 않았다. 서연의 고모와 고모부로 나오는 두 배우는 드라마를 보다 안정적으로 만들어준다.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그에 맞는 배역을 맡는 것은 이렇게 좋은 모습을 이끌어낸다.
서연을 사랑으로 키워 준 고모와 묵묵한 고모부. 그 어떤 마음으로 키우더래도 친 엄마 아빠와 같을 수 있었겠느냐만 그래도 서연이 이런 집에서 자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리 넉넉하진 않던 형편임에도 서연과 문건이를 공부시키고 키워주었다. 나중에 서연이 아프게 된 다음에도 고모는 서연을 돌봐준다. 엄마도 저렇게는 못했을 것 같다 싶을만큼 서연에게 따뜻히 잘 해준다. 엄마가 아니어서 더 그랬었던 걸까.
요즘 드라마를 볼 때 뭔가 적재적소에 들어가지 못한 듯한 조연들을 보면 생각나는 배우가 정준이다. 조연으로서 최적합한 모델같은 인물이다. 지나치게 잘생기진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마스크, 자연스러운 연기... 근래엔 생각보다 이런 배우를 찾기가 어렵다. 요즘, 그리고 한동안 앞으로 나올 젊은 배우들 중에서 이런 느낌의 배우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요새는 너무도 남자의 성적 매력만을 본다. 호리호리한 키와 부자연스러워도 성적으로 매력있는 얼굴, 날씬한 몸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못생긴 사람으로 극과 극으로 나뉜다. 그런 키 크고 성적인 매력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매력있는 자연스러운 연기자를 보고 싶다. 사람이 극과 극으로 나뉘고 차별되는 게 싫다. 적당히 괜찮은 외모와 연기력이 드물다.
서연의 고모의 딸의 남편인 그는 배우로서도 적재적소의 인물이지만, 극 중 인물로서도 드라마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부분이 있다. 극 중 빵가게를 하는 그는 어느모로 보나 무던한 사람이다. 아내의 모난 성격도 받아주는 듯 하면서도 또 바보같이 과묵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다. 아무튼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이 드라마에서밖에 본 기억이 없고, 볼 때에 저 배우 참 자연스럽게 연기 잘한다고 생각했던 지형의 이모역을 맡은 배우다.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데 여기서만 그것도 무게감도 없는 비중도 없는 이모 역할로 나온 것이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보자면 이런 이모 역할의 배우마저 아무나 고르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에 대해 잘 몰라서 더는 자세히 할 말은 없다. 그냥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두고 싶어, 그가 잘 못하는 연기도 보고 싶지 않고 필모그래피도 보고 싶지 않아, 남겨두다가 몇 년만에 이 포스팅을 작성하며 검색해봤는데 출연작이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정말 안 알려진 배우인가보다.
극 중 지형의 이모는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게 아무 역할도 아닌 것은 아니다. 딱딱하고 침체돼있기만 한 지형의 집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유일한 인물이자, 늘 지형 편에서 편히 생각해주는 어른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내게 올드한 연속극으로 기억되지 않는, 의외로 젊은 드라마로 기억되는 이유는... 서연의 동생 역이 있어서이지 않아서인가 싶다. 박유환은 조연으로 꽤 괜찮은 배우였다. 내 또래의 배우가 드라마에서 젊은 역할로 출연하는 느낌은... 왠지 그 드라마를 친근하게 만든다. 배우를 잘 차용하고 부족한 연기력도 그럴싸하게 만드는 건 김수현 작가의 힘이 아닌가 싶다. 가만히 배우의 연기만 보면 어색할 법도한데 극에 녹아들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한다.
극 중 서연의 동생인 문건은 서연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다. 서연과 고모의 돌봄 속에서 자라서인지, 어렵게 자랐지만 그런 티는 많이 나지 않는다. 서연으로 하여금 누나로서의 책임감을 갖게 해주고 삶에 대한 의지를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문건은 젊은 느낌만 뿜어내진 않는다. 끝이 없는 문건의 아르바이트는 그를 밝기만한 인물로 비추진 않는다.
극본에 대해선 할 말이 별로 없다. 그 어떤 극본보다도 할 말이 별로 없다. 칭찬이든 흠이든 달리 할 말이 없다. 김수현 극본이다. 김수현 작가는 극본 그 자체보다도 캐스팅이나 연출에 관여하는 부분에서 높이 살만하다. 소품에 대해 꽤 세세한 지시가 대본에 적혀 있고, 캐스팅도 아무나 하지 않는다. 최근작에선 그렇지도 않지만.
이 작품은 김수현 작가의 극본의 불편한 부분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
자꾸만 까먹는 것이 심해져 병원을 찾은 서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내색하지 않으려 한다.
서연이 빨대로 음료를 마시는 장면과
차가 지나가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서연의 얼굴은 일부러 잡았다.
전화를 하는 장면은
그 뒤의 배경
서연의 옷과 머리 모양과 더불어
왠지 쓸쓸함을 비춘다.
남들한테서 밝은 척 하려 하지만...
길가에 서있으면
혼자 있을 때면
마음 한 켠 어두움이 얼굴에서 드러난다.
서연이 엄마를 만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죽기 전에 해야할 숙제 같은 것이기도 했을 듯 싶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일기를 쓰는 걸 계속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일기를 쓰고 나면
오히려 내 기억은 일기장 속에 담기고
내 머리에선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
점점 망가져가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는지
기차가 지나가는 곳에서
서연은 뛰어들려 한다.
삶은 슬픔에 빠지면
내가 그 슬픔에서 빠져나와도
삶은
헤어나오지 못한다.
서연은 떠나고 남편은 아이와 함께 서연의 무덤을 찾는다. 예전에 봤을 때 서연의 죽음이 분명하게 나오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는데, 이제보니 서연이 얼마 안돼 죽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삶이 끝나가는 과정, 무너져가는 길을 보여준다. 치매를 다룬 다른 드라마들과는 다른 항로를 따라간다. 어른이라면 한 번 봐볼만한 드라마이다.